할멈은 내게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다.
“할멈이나 여름이도 믿으면 안 되는 거야?”
“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쇤네나 여름이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셔야 해요.”
그때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할멈이 하고 싶었던 말은 상황에 따라 내가 누구든 배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묶는 자는 주어진 것을 뺏는 자이고 지위를 박탈하는 자이고 생명을 거두는 자이다. 군림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얽매여서는 곤란하다. 뱀 같은 혀로 그들을 속일 것이며 누구보다 재빠르게 움직여야 하며 겁을 먹게 해야 한다. 하지만 기껏 열다섯밖에 안 되는 계집애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부모의 원수를 갚고 정의를 구현하며 정당한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멀고도 먼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다행히, 할멈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겠지만 아무런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성적을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잔소리할 부모가 없어서 그 걱정조차 한가하고 막연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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