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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

백색의 마녀 스카라

by 이서말 2022. 6. 9.
너무 무례한 사람들이야, 그런데, 아빠는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아빠는 여러 가지를 신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놀랄 만큼 단호한 결정을 내리곤 하지.
그래도 너무 속상해.
 
아이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식탁 위로 뛰어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뭘?
천하의 마녀 스카라님이 그런 모욕을 참다니 놀랄 일이군.
고양이 주제에 아는 척 하지마. 난 섬세한 남편을 사랑하고, 호기심 많고, 정의로운 딸을 사랑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엄마지, 전사가 아니거든.
그녀가 히죽 웃었다. 피의 복수라 불렸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던 내게는 무척 생소한 모습이었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너무 이상해서 끔찍할 정도군.
나는 그녀가 내던지는 접시를 피하며 창 밖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야~옹
 
이년 뒤 스카라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주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뭐해?
그녀는 고개를 들어 살짝 노려보곤 대답했다.
넌 눈도 없냐? 술 마신다. 왜?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하지.
대꾸도 안하고 그녀는 입 속에 위스키를 한 컵 털어 넣었다.
마녀단의 규율이야 명확한 것을, 뭘 기대한거야? 아이는 또 낳으면 되지.
한참 동안 조용했다.
 
남편은?
기억을 지웠으니 아픔도 없지.
너도 좀 지워달라지 그랬어.
“엄마도 기억 못하면 루나가 너무 불쌍하지.
정의로운 딸에게는 어울리는 삶일 수도 있어.
겨우 아홉 살인데. 넋이 빠져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딸이 대사제 수련생으로 선택되리라 누가 예상했겠는가? 이백오십년을 제1선에서 봉사하고 명예롭게 은퇴하여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그녀였는데, 마녀의 자질을 보인 딸을 조직에 뺏기게 된 것이다. 족속의 규범은 엄중하다.
다시 뺏어오겠어. 자신을 향한 다짐같은 말을 내뱉었다. 번쩍이는 눈동자에서는 살짝 광기가 보였다. 모름지기 훌륭한 고양이란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그래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나는 훌륭한 고양이기는 하지만, 또한 호기심이 많은 고양이니까.
남편은 어떻게 하고?
잠시 흔들리던 시선이 곧 고정됐다.
“나에 대한 기억도 지울 거야. 그는 문제없어.
또 십년이 흐르고, 가끔 바람 따라 백색마녀족과 홀홀단신 외롭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스카라의 소식을 들었다. 스카라가 지금보다 좀 무능했거나, 백색마녀족이 예전의 정리를 잊고 좀더 가혹한 수단을 썼다면 벌써 끝날 싸움이었다. 한쪽은 미친듯이 달려들지만, 한쪽은 흔적을 지우고 숨어 다녔다.
 
나는 가끔 그녀를 만날까 하는 기대에서 남편 주위를 맴돌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정말로 까마득히 잊은 듯 생활을 잘 해나갔다. 제법 핸섬하게 생겼던 그는 그 후로 삼년 만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하나뿐인 목숨이 두렵지 않더냐? 스카라를 두고 다른 여자와? 아무리 모든 것을 잊었더라도.'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쳤다.
틀림없이 스카라가 결혼식장에 와서 깽판을 놓을 줄 알았는데, 별일 없이 결혼식은 끝났고, 밤 늦게까지 파티가 계속됐다. 슬쩍 빠져 나온 신랑, 신부가 침실로 숨어 들었다. 나는 예의바른 고양이기는 하지만, 또한 호기심이 많은 고양이라 살짝 엿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놈의 신랑이 신부의 옷을 벗기다 말고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그는 말없이 창 밖을 가르키더니,
달, 저 달. 하고 말했다.
달이 왜요? 창에서는 둥근 달이 휘영청 고고한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 으으하 언젠가부터 보름달만 보면 눈물을 참을 수가 없네. 바보 같지? 젠장. 으으으 멈출 수가 없네. 젠장.
괜찮아요, 괜찮아. 신부가 커튼을 치고, 부드럽게 그의 옷을 벗기는 동안 그는 멍청히 창쪽을 쳐다보며 계속 눈물을 짜내고 있었다.
달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백색의 마녀 스카라, 그래서 딸 이름도 루나였다.
기억이 없어도 아픔은 지워지지 않는군.
마녀로 사는 것이나, 사람으로 사는 것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나른한 고양이가 최고다.
 
- J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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