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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

큐브

by 이서말 2022. 3. 29.

  내가 사는 성은 꽤 널찍하다. 몇 개의 방이 있는지 몇 명의 사람이 안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가장 극적인 것은 끝도 없이 방의 개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도 하는 등의 변화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성의 구조나 모양도 자주, 그리고 갑작스럽게 바뀐다. 어떤 날은 분명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식탁에 놓여 식사하러居住人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도 있었다.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변화가 가득한 이곳 생활은 익숙해지기만 하면 유쾌하다. 각자 자신의 비법이 있겠지만,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방법은 길 찾기를 포기하고 현재 상황을 충실히 이행하는 거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리 뛰어다녀봐야 식당을 발견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목욕탕이면, 목욕한다. 우연히 식당을 만나면 먹고, 침대를 만나면 잔다. 계단이 있으면 올라가거나, 내려가고. 가끔 운이 좋아 사교장이나 게임룸이 발견되면 사람들과 (종종 이상한 부류의 종족들과)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소식이나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대부분 시효가 지난 그저 잡담거리일 뿐이다. 아는 얼굴을 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이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안에 있고, 얼마나 넓은 세상인가?

  밖에서 봤던 성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렇게까지 거대해 보이진 않았다. 엄마는 하얀 입김을 뿜으며 말했었다.

“이곳이라면 굶지 않아도 되고, 훗날이겠지만 네 사랑도 잃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엄마는 어디가?”

“난 너무 지쳤다. 좀 쉬어야겠어. 너 먼저 들어가렴.”

“같이 가.”

“엄마 말 들어. 금방 따라 들어갈게.”

  빼꼼히 문을 열어 잠깐 들여다본다고 한 것이 뒤에서 엄마가 확 밀치는 바람에 덜컥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사라지고 어지러운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사랑은 얼마나 날아가기 쉬운가? 사랑을 만나면 이곳에서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녀야 한다.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목욕할 때나 심지어 작고 큰일을 볼 때도. 그렇지 않으면, 작은 틈으로 천리만리 공간이 생겨나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밀착된 동거는 서로에게 가혹한 일이기 때문에 곧 포기하고 결별하게 된다. 늘 그리워서 못 견뎌 해도 혼자 지내는 것이 인간적이다. 속속들이 알아야 할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완벽하게 이해받고 싶지도 않다. 적당한 거리 조정이 서로를 편안하게 한다.

  그래도 사실은 당신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당신의 얼굴도, 당신의 향기도, 당신의 목소리도, 희미해진다. 다시 한번 그대를 눕히고 온몸 구석을 핥아, 닳도록, 그대의 몸에 열기를 불어 넣어, 산산이 녹아내려, 감싸 안고, 으스러지게 또는 부드럽게. 철없이 온몸이 달떠 잠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함께 이 성에 갇혀 있지만, 만남을 기약할 수 없다. 어처구니없는 묘함이다. 거대한 짐승의 배 속에서 조금씩 소화되는 중일지도.

 

- J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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