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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6

백색의 마녀 스카라 “너무 무례한 사람들이야, 그런데, 아빠는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아빠는 여러 가지를 신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놀랄 만큼 단호한 결정을 내리곤 하지.” “그래도 너무 속상해.” 아이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식탁 위로 뛰어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뭘?” “천하의 마녀 스카라님이 그런 모욕을 참다니 놀랄 일이군.” “고양이 주제에 아는 척 하지마. 난 섬세한 남편을 사랑하고, 호기심 많고, 정의로운 딸을 사랑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엄마지, 전사가 아니거든.” 그녀가 히죽 웃었다. 피의 복수라 불렸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던 내게는 무척 생소한 모습이었다. “안 어울려. 안 어울려. 너무 이상해서 끔찍할 정도군.” 나는 그녀가 내던지.. 2022. 6. 9.
애프터 신청의 기준 나이 서른이 되니 주변에서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난리다. 이 나이 먹도록 결혼 못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좋은 여자가 있다고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직업인지라 빈말인 경우도 있지만, 또 적극 날짜를 잡자는 행동파도 있다. 고객들 뿐 아니라 친구나 친척, 사돈의 팔촌도 연락해 소개해 준다고 제안한다. 온 세상이 뚜쟁이라도 된 듯싶다. 어쨌든 비혼주의 신념은 없는지라 들어오는 소개를 마다하지 않는다. 많이 들어올 때는 연속으로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약속이 잡힐 경우도 있다. 그러면 모두 애프터 신청을 할 수 없으므로 선택의 기준이 필요하다. 어떤 여자는 얼굴이 예쁘고, 어떤 여자는 성격이 좋아 보이고, 어떤 여자는 재미있다... 2022. 4. 15.
이야기의 시작 할멈은 내게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다. “할멈이나 여름이도 믿으면 안 되는 거야?” “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쇤네나 여름이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셔야 해요.” 그때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할멈이 하고 싶었던 말은 상황에 따라 내가 누구든 배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묶는 자는 주어진 것을 뺏는 자이고 지위를 박탈하는 자이고 생명을 거두는 자이다. 군림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얽매여서는 곤란하다. 뱀 같은 혀로 그들을 속일 것이며 누구보다 재빠르게 움직여야 하며 겁을 먹게 해야 한다. 하지만 기껏 열다섯밖에 안 되는 계집애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부모의 원수를 갚고 .. 2022. 4. 1.
큐브 내가 사는 성은 꽤 널찍하다. 몇 개의 방이 있는지 몇 명의 사람이 안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가장 극적인 것은 끝도 없이 방의 개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도 하는 등의 변화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성의 구조나 모양도 자주, 그리고 갑작스럽게 바뀐다. 어떤 날은 분명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식탁에 놓여 식사하러 온 居住人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도 있었다.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변화가 가득한 이곳 생활은 익숙해지기만 하면 유쾌하다. 각자 자신의 비법이 있겠지만,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방법은 길 찾기를 포기하고 현재 상황을 충실히 이행하는 거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리 뛰어다녀봐야 식당을 발견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목욕탕이면, 목욕한다. 우연히 식당을 만나면 먹고, 침대를 만.. 2022. 3. 29.